투자 고수들이 은밀히 사랑하는 '죄악의 주식'
투자 고수들이 은밀히 사랑하는 '죄악의 주식'
“담배·술·도박·무기·포르노 같은 ‘죄악의 주식(sin stocks)’에 투자하지 마라.” 친환경적이고 사회 공헌을 많이 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SRI(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펀드가 유행하면서 이른바 ‘죄악의 주식’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범 기업들이 결국 장기적인 수익성도 더 좋다는 논리에서 나온 트렌드다.
그런데 ‘모범생’ 대신 ‘청개구리’에 투자해 보는 전략은 어떨까.
기업윤리나 사회적 책임을 떠나 순수하게 투자 수익만 따진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실제로 ‘죄악의 주식’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잘 팔리는 상품을 가지고 있는 셈이어서, 기업 자체는 튼튼한 경우가 많았고, 투자 실적도 높았다.

◆‘사악한 펀드’의 탄생=2002년 8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Vice Fund(사악한 펀드)’라는 이름의 펀드가 태어났다. 이름 그대로 이 펀드는 ‘반사회적’ 주식들만 집중적으로 편입한다. 말보로를 생산하는 담배회사 알트리아그룹(옛 필립모리스)과 던힐로 친숙한 BAT, 조니워커·윈저로 세계 최대의 주류 회사가 된 디아지오, 세계 최대의 카지노그룹 엠지엠 미라지와 그 경쟁사인 라스베이거스 샌즈 등이 이 펀드의 주요 투자처다.
처음, 이 펀드는 업계에서 손가락질당하고, 투자자로부터 외면받았다. 그런데 수익률이 펀드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평균 주가 상승률보다 평균 1~2%포인트 높았던 것이다. 지난 5월 말 현재 이 펀드의 1년간 수익률은 24%로, 같은 기간 각각 22%와 20%를 기록한 다우지수와 S&P500지수를 능가했다.
이 펀드를 굴리는 매니저 찰스 노튼(Norton)의 철학은 간단하다. 수익률이 좋으니까 투자한다는 것이다. 그는 “담배·술·도박 등은 경기 불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산업이고, 규제 장벽이 높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고수들의 은밀한 사랑=미국 증시에서 지금까지 장기 투자 수익률이 가장 좋은 종목은 초일류 기업으로 칭송받는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매년 수천억 원씩 사회 공헌에 바치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아니다. 바로 암환자들에게 줄소송을 당하는 알트리아(옛 필립모리스)다.
이 종목은 1957년 상장된 이후 50년 동안 연평균 19.75%씩 상승해, 누적수익률이 무려 81만 9829%에 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금연 열풍이 확산되는 와중에 왜 담배 산업은 계속 성장하는 것일까.
뉴욕 타임스는 ‘담배 산업의 미스터리’라는 기사에서 “담배는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대체재(代替財)를 찾기 힘들고, ‘연기 안 나는 담배’, ‘저타르 담배’ 등이 나와 흡연자들의 금연 의욕을 꺾어 놓는다”고 분석했다.
선견지명으로 이 종목만 붙들고 늘어진 사람이 있다. 벤 버냉키(Bernanke)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주식시장에서 유일하게 알트리아만 사들였는데, 지난해 의장이 되면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주식을 모두 판 것으로 알려졌다.
워런 버핏이 운영하는 ‘버크셔 해서웨이’도 버드와이저 맥주를 만드는 앤호이저부시의 5대 주주 중 하나고, 전설적인 펀드 매니저인 피터 린치도 담배와 술 제조업체를 ‘경기방어산업’이라고 하며 즐겨 투자하곤 했다.
◆한국판 죄악의 주식들=국내에선 SRI펀드가 대유행이지만, 아직 반대 개념의 펀드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삼성·미래에셋·굿모닝신한·동양종금·메리츠증권 등 5개 증권사에 “SRI펀드가 꺼리는 ‘담배·도박·술’ 등의 업종에서 앞으로 성장 가능한 종목이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들 증권사에서 2표 이상의 추천이 나온 10개 종목을 추렸더니 강원랜드·KT&G·하이트맥주·한빛소프트·파라다이스·두산·SK정유·오리온·LG화학·엔씨소프트로 구성되는 ‘한국판(版) 죄악의 주식’ 리스트가 나왔다. 물론 이들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며, 업종만 갖고 추려낸 것이다. 올 들어 이들 종목의 평균 수익률은 49.6%로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 상승률(27.4%)보다 2배 가까이 높았고 SRI펀드들이 올린 22~32% 정도의 수익률도 웃돌았다.
◆죄악의 주식이란
담배·술·도박·무기업종처럼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의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과 그 기업 주식을 뜻한다. 물론, 기업 자체가 반사회적이거나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지는 나쁜 업종이라도, 주가는 좋은 이미지의 기업 못지 않다는 뜻에서, 유머러스하게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이다.